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사레 보르자 (문단 편집) ==== 1489년 ~ 1497년 ==== 1489년 [[교황령]]에 있는 [[로마 사피엔차 대학교|교황청립 대학]]에서 공부하기 위해 체류했고, 이후 3년간 페루자와 피사의 대학들에서 공식 교육을 마무리했다.[* 이때 페루자는 약 2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와 그 도시를 둘러싼 부유한 농촌 지역(Contado)으로 이루어진 [[교황령]]의 중요한 도시였지만, 실세는 교황이 파견한 관리가 아니라 지방 귀족인 발리오니 가문에게 있었다. [[아비뇽 유수]] 이래로 교황의 지배를 받던 로마냐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형식상으로만 교황의 지배를 인정하고 실질적으로는 모조리 떨어져나갔기 때문으로, 훗날 체사레 보르자는 이 도시들을 형식 지배에서 실질 지배로 바꾸고 자신의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.] 1491년 15세 때 [[사제(성직자)|사제]] 서품을 받지 않는 가운데 팜플로나의 [[주교]]가 되었고,[* 이때 팜플로나 주민 전원이 분개해 봉기를 일으켰다. 그의 아버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임명 이유를 순진하게 "그의 공적, 미덕, 신조"라고 발표했고 체사레 또한 대리인을 보냈다. 그러나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결국 [[교황]] [[인노첸시오 8세]]가 개입해 유야무야된다.] 그리고 그 해에 팜플로나 [[주교]]의 신분으로 [[피렌체 공화국]]의 [[피사]]로 가 그곳에서 [[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]]의 차남이자 [[추기경]]이며 후일 [[레오 10세]]로 알려진 조반니 메디치와 알게 된다.[* 둘은 동갑이긴 했지만 조반니의 서기였던 세르 스테파노의 기록을 보면,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사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도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.] 그 뒤 1492년 [[교황]]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고 그의 아버지가 [[교황]]에 선출되자 18세에 발렌시아의 [[추기경]]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심장부에 진출했다. 성직자의 자식들은 사생아 취급을 받기에 보통 [[주교]]까지가 한계인데, 체사레처럼 [[교황]]의 사생아가 [[추기경]]까지 오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.[* 물론 사생아 출신으로 [[교황]]의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긴 한데, 이쪽은 태어나자마자 큰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. 이 사람이 바로 위에서 거론되었던 [[레오 10세]]의 사촌 동생인 [[클레멘스 7세]]. 아버지는 피렌체의 명문가 [[메디치 가문]] 출신인 [[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]]로, 큰 아버지가 그 유명한 '''로렌초 일 마니피코''' [[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]]이다. [[프란체스코 데 파찌|파찌 가문]]의 음모로 동생이 죽고 난 뒤 동생의 애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메디치 가문의 적자로 받아들였던 것. 다른 설도 있는데, 당시 교회법에서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두 커플이 서로 배우자가 되겠다고 맹세만 하면 그 자식은 적자로 인정을 받았는데, [[클레멘스 7세]]의 양친은 그것을 했다고 전해진다. 참고로 로렌초가 그 조카를 받아들인 건 생모가 죽은 뒤였다. 하지만 체사레의 경우 확실한 사생아였기 때문에 내연녀였던 반노차와 그녀의 남편이었던 도메니코 다 리그나노의 아들로 해야 했고 후일 공식석상에서 조카로 기록된다.]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. 이는 비(非) [[이탈리아인]]과 측근들로 [[추기경]]단을 꾸리려 했던 [[알렉산데르 6세]]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. 이 와중에도 교황 [[알렉산데르 6세]]는 체사레보다는 여전히 후안을 더 총애했다. 본인이 소풍 갈 때 체사레를 빼놓고, 인질로 잡혀왔던 [[오스만 제국]]의 황자 [[젬 술탄|젬]][* 사정이 조금 복잡한데, 먼저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황태자들끼리 하나뿐인 옥좌를 두고 [[내전]]을 벌이는 것이 관습이자 법이었다. 이에 젬도 부황인 [[메흐메트 2세]]가 죽자 형인 [[바예지드 2세]]와 내전을 벌였는데, 그 결과 패배하여 [[구호기사단]]이 차지하고 있던 [[로도스 섬]]으로 망명. 이를 전해들은 교황 [[인노첸시오 8세]]가 기사단 측에 "얘를 개종시켜서, 이교도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 총사령관으로 삼아야 겠음."이라고 통보하여 신병을 넘겨받았다. 하지만 젬은 기독교로 개종할 뜻이 없었고, 파디샤가 된 [[바예지드 2세]]도 "우리 나라로 돌아오면 골치 아프니, 그냥 계속 붙들고만 있으시오."하고는 그 대가로 금과 성유물을 보냈다.]과 대동했을 정도였다. 허나 체사레는 점차 아버지의 정치적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. 1494년 [[샤를 8세]]의 [[이탈리아]] 침공 전 주요 지역을 정찰할 때 함께 동행했으며 부친의 협상에 은밀히 관여하였고, [[스페인]]에 있던 형제 후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편지까지 보내는 등 가문의 일도 도왔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[[샤를 8세]]가 [[이탈리아]]를 침공, [[로마]]로 향하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지켜봐야 했고, 결국 12월 18일 피신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설상가상으로 [[프랑스군]]이 [[로마]] 근처에 도달했고, [[로마]] 시민들 또한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 [[프랑스]] 왕과 협상하지 않는다면 성문을 열 것이라고 통보했으나 [[알렉산데르 6세]]는 갑작스럽게 [[로마]]에 남아 [[샤를 8세]]와 협상을 했다. [[샤를 8세]]가 [[산탄젤로 성]]과 젬 왕자를 넘기는 것과 체사레를 볼모로서 나폴리 원정으로 동행하는 무리한 조건을 걸자, 협상은 결렬되었다. [[알렉산데르 6세]]와 체사레 부자는 지하통로로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[[프랑스군]]의 포위공격으로 [[알렉산데르 6세]]는 [[샤를 8세]]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1월 28일 체사레는 [[프랑스군]]과 함께 나폴리로 향했으나 1월 30일 벨레트리에서 말구종으로 변장한 채 [[프랑스군]] 진영을 탈출해 [[로마]]로 스플레토에 있는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로 돌아왔다.[* 체사레의 탈출 계획은 그가 [[프랑스군]]을 따라 [[로마]]를 떠나기 전에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, 그는 잠시 [[로마]]에 들려 사람들로 하여금 주둔하고 있던 [[스위스 용병]]들을 습격하게 만들었는데, 어머니였던 반노차의 집이 이들에게 약탈당했기에 보복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.] 체사레의 탈출을 알게된 [[샤를 8세]]는 경악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[[교황]]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 체사레를 내놓으라고 항의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며, 점차 두 사람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. 비록 샤를은 나폴리에 무혈입성하여 나폴리 왕을 자칭하긴 했지만, [[알렉산데르 6세]]의 제안에 의해 [[교황령]]을 주축으로 [[밀라노 공국]], [[베네치아 공화국]]이 최초의 '''신성 동맹'''[* 교황령이 주창하긴 했지만, 주도권은 많은 병사를 제공한 베네치아에 있었다. 따라서, 이 동맹을 '''베네치아 동맹'''이라고도 한다.]을 결성하는 한편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[[시칠리아 섬]]으로 피신한 전(前) [[나폴리]] 왕이 스페인의 지원군과 함께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샤를은 급히 프랑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. 그 와중에 체사레가 이때 [[매독]]에 걸렸다는 주장이 있다.[* [[추기경]]직을 버리고 나폴리를 다녀올 때 몬토바 후작부인의 밀정이었던 도나토 데프레티의 보고에서, 그가 당시 [[프랑스]] 질병으로 불렸던 [[매독]]에 걸렸다고 보고했다.] 1497년 6월 14일 수요일 오후 체사레는 동생 후안과 사촌인 몬레알레의 [[추기경]]인 후안 보르지아와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만찬을 했다. 그 후 동생 후안은 귀가길에 갑작스럽게 행방불명되었다가 2일이 지나서야 하인과 함께 테베레 강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. 수중에 있던 지갑의 돈도 없어지지 않은 채였다.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체사레로 추정되고 있다.[* 단, 이는 아무 이유도 없이 수사가 중단된 것과 당시로서는 형제간 살해가 드물지 않았다는 것, 후안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알렉산데르가 "범인이 누군지 알겠다."라고 중얼거렸다는 소문 등을 근거로 한 추측일 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, 오히려 체사레의 정적이자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체사레를 범인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체사레는 한참 뒤에나 용의자 명단에 올랐다.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절반은 믿고 절반은 불신하는 추세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